[문화 산책] 위드 코로나 시대의 ‘우리’
얼마 전 한국에 열린 음악회를 유튜브로 감상했다. 참 기묘하고 낯설었다. 지휘자를 비롯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마스크를 썼다(입을 써야 하는 관악기 연주자들과 피아니스트는 빼고). 그것도 시커멓고 커다란 마스크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연주자들이 모두 검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 입었다. 장송곡이라도 연주할 듯 엄숙하고 묵직한 분위기다. 그런데 연주하는 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이다. 그러니 기묘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이런 것이 이른바 ‘위드 코로나’의 한 모습인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연주하는 음악을 마스크로 단단히 무장하고 감상하고… 그렇게 안전하고 품위 있게 인생을 즐긴다? 가수도 마스크를 쓰고 노래 부를 판인가? 가슴이 답답해진다. 연극 공연이나 미술전람회처럼 현장의 숨결이 중요한 분야의 작품들도 집에서 영상으로 감상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른바 비대면 온라인 공연이라는 것인데, 수박 겉만 핥고 다 먹었다고 여기는 격이다. 전염병 때문에 그렇게 세상이 바뀐다고 호들갑이다. 그러니까, 완전히 물리칠 수 없으면 견디는 수밖에 없다, 코로나도 독감처럼 여기고 예방주사 맞아가며 함께 살아라, 사망자로 따지자면 독감이나 엇비슷하니 너무 겁먹을 것 없다… 뭐 그런 이야기다. 그걸 ‘위드 코로나’라는 낱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코로나와 함께’가 되려나? 꼴 보기 싫은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기분처럼 더럽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 삶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에 반해, 한 두 해 어렵다고 수천 년 쌓아온 인간의 삶이 쉽사리 바뀔 리 없으니 너무 요란 피우지 말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사람들은 이미 거리두기나 비대면에 익숙해졌고, 혼자 살기에도 많이 길들여졌다. 아무래도 코로나 이전처럼 끈끈하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휴대전화니 온라인 소통 같은 것이 극성을 부리는 판에 코로나가 겹쳐서 변화가 한층 클 전망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고 굳게 믿으며 공동체의 끈끈한 정을 소중하게 여겨온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변화다. 한때 ‘나들’이라는 낱말이 관심을 모은 적이 잠시 있었다. ‘나’의 복수를 ‘우리’ 대신 ‘나들’로 하자는 제안으로, 개성이 살아있는 개인인 나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람직한 사회라는 주장이었다. 제법 설득력 있게 들렸다. 하지만 한국인 특유의 심성을 대변하는 ‘우리’라는 낱말을 대신할 만큼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얼마 전 한국어로 두 권으로 책을 펴낸 ‘토종 미국인’ 로버트 파우저(60)씨에게 “한국어 표현 중에 좋아하는 낱말을 꼽아 달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만 꼽자면 ‘우리’라는 말이요. ‘우리 선생님’이라거나 ‘우리 교수님’ 이런 식으로, 가족 관계가 없더라도, 당신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우리’라는 말을 붙이는 게 너무 좋아요. 미국에서는 굉장히 좁은 의미로만 ‘우리’를 사용하니까요.” 우리 한국 사람에게 ‘우리’라는 낱말은 단순한 나의 복수가 아닌 것이다. 설마 코로나 때문에 우리라는 정겨운 낱말이 사라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겠지. “우리가 남이가?”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코로나 위드 위드 코로나 코로나 이전 코로나 때문